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궁리 유적 (문단 편집) === 《관세음응험기》의 기록 === >百濟武廣王 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>백제 무광왕께서 지모밀지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셨다. > >以貞觀十三年歲次 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 帝釋精舍 佛堂 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皆燒盡 >정관 13년(639) 기해[* 정관 13년, 즉 서기 639년은 [[무왕]]이 [[미륵사]]를 세웠거나 최소한 미륵사의 석탑을 건립한 해이다.] 겨울 11월, 하늘에서 크게 천둥과 함께 비가 내려 마침내 재해가 있었는데, 제석정사와 불당 칠급부도와 회랑과 승방이 일거에 모두 불타버렸다. > >塔下礎石中 有種種七寶 亦有佛舍利 睬水精甁 又以銅作紙 寫金剛波若經 貯以木漆函 >탑 아래의 초석 안에는 여러 칠보가 있고 또한 불사리와 채색한 수정병, 또 동으로 만든 판에 사경한 금강바야경[* 바야(波若)는 범어 쁘라갸(prajñā)를 음차한 한자어 반야(般若)의 다른 표현이다. '파야' 또는 '파약'이라고 잘못 읽기 쉬우나 여기서는 '바야'로 읽음이 맞다. '바야경'은 '반야경'과 같은 말로 반야 사상을 설명하는 불경(반야부 경전)을 두루 가리키는데, 《[[금강경]]》은 반야부의 대표적인 경전이다.]과 그것을 담은 목칠함이 있었다. > >發礎石開視 悉皆燒盡 唯佛舍利甁 與波若經漆函 如 >초석을 들추어 열어 보니 모두 다 불타 없어지고 오직 불사리병과 바야경의 옻칠함만이 옛날과 같이 있었다. > >水精甁 內外徹見 盖亦不動 而舍利悉無 不知所出 >수정병은 안과 밖이 환히 보이고 뚜껑은 역시 움직이지 않았으나 사리는 모두 없어졌고 어디로 나갔는지 알지 못했다. > >將甁以歸大王 大王請法師發卽懺悔 開甁視之 佛舍利六箇 俱在處內甁 >그리하여 사리병을 대왕에게 가지고 왔는데, 대왕께서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서 병을 열어 안을 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병 속에 있었다. > >自外視之 六箇悉見 於是 大王及諸宮人 倍加敬信 發卽供養 更造寺貯焉 >병 밖에서도 그것을 보니 6개 사리가 모두 보이므로, 이에 대왕 및 여러 궁인들은 삼가 믿는 마음을 더욱 더했고 공양을 올리며 다시 절을 지어 그 안에 봉안하도록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